2025년 7월 말,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고위급 통상회의는 단순한 외교 일정 이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번 회담은 양국 간 긴장 요소였던 무역 문제 해결을 넘어, 장기 협력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한국으로서는 시험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일부 민감한 농축산 품목이 협상에서 빠지면서, 우리나라 정부의 전략적 의도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변화된 협상 테이블, 2+2 방식
이번 협의는 기존의 일반적인 통상 회담과는 다릅니다. ‘2+2 통상협의’라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 양국의 경제 핵심 인사들이 동시에 모였습니다. 한국은 기획재정부와 통상교섭본부가, 미국은 재무부와 무역대표부(USTR)가 각각 참석했습니다. 이 조합은 상징적입니다. 무역을 논하면서도, 그 배후에 깔린 금융과 산업 전략까지 포괄하겠다는 의도로 보입니다. 협상 시점도 절묘했습니다. 양국이 상호 관세 유예 조치를 종료하기 직전, 마지막 조율의 성격을 띤 회의였습니다. 준비 시간은 짧았지만, 논의의 범위는 넓었습니다. 특히 미국이 요구해온 반도체 공급망 협력, 전기차 배터리 관련 투자, 조선 산업 공동 프로젝트 등은 빠짐없이 테이블에 올랐습니다. 한국 정부는 빠르게 대응했습니다. 회의 직전, 관련 부처들이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열고 대응안을 조율했으며, 민감 품목을 협상 대상에서 제외하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는 대외 압박을 완화하면서도, 국내 산업을 보호하겠다는 메시지로 해석됩니다. 특이한 점은 이번 회의가 결과 중심이 아니라 방향 중심이었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인 계약보다는, 향후 협상에서 쟁점이 될 수 있는 사안을 조율하고,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는 ‘사전 정비 성격’의 회의였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쌀과 소고기, 회의에서 왜 빠졌을까?
쌀과 쇠고기. 그 이름만 들어도 민감합니다. 특히 통상협상이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할 때는 더 그렇습니다. 이번 회의에서 이 두 품목이 아예 빠졌다는 사실은 단순한 의제 조정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한국 정부는 국내 민심을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쌀은 여전히 자급률이 중요한 전략 식량이며, 소고기는 과거 미국산 수입 파동 이후 안전성 문제가 반복적으로 제기되어 왔습니다. 소비자 단체와 농민 단체 모두가 강하게 반발할 가능성이 높은 사안을 일부러 제외시켰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정부는 대신 덜 민감한 품목들을 교환 카드로 활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체리, 블루베리, 오렌지 같은 일부 과일류에 대한 검역 조건 완화가 논의됐습니다. 이런 선택은 민심을 크게 자극하지 않으면서, 미국 측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묘수였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이에 동의했을까요? 지금은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미국은 여전히 쇠고기 월령 제한 해제를 주장하고 있으며, 자국 농민들의 수출 확대 요구가 만만치 않습니다. 다만 이번 회담에서는 한 발 물러섰다는 점에서, 한국 정부가 최소한 이번 국면에서는 방어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민감품목 배제 전략은 앞으로도 반복될 가능성이 큽니다. 국내 소비자의 정서와 산업 보호라는 두 가지 명분이 확실한 상황에서, 정부는 '차선의 합의'를 추구하는 쪽으로 협상 전략을 구성할 것으로 보여집니다.
투자 중심 외교 아젠다, 새로운 협상안 도출
이번 협의에서 가장 큰 변화는 ‘투자’라는 키워드였습니다. 단순히 수입을 늘리는 것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실질적인 투자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협상이 진행된 겁니다. 정부는 이를 ‘투자 패키지’ 전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미국 측은 이미 일본과의 협상에서 대규모 펀드를 받아낸 전례가 있습니다. 한국에도 동일한 수준의 투자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정부는 이에 선을 그었습니다. 대신 반도체, 배터리, 조선, 에너지 등 4대 핵심 산업에서 실질적인 협력안을 제시했습니다. 대규모 투자 대신, 실현 가능한 합작 사업과 공동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협상 구도를 짰습니다.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과의 협력은 중요합니다. 미국은 자국 내 생산시설 유치를 원하고 있고, 한국은 공급망 안정을 추구합니다. 이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지점에서 상호 투자가 추진될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정부는 단순히 “얼마 투자하겠다”는 식의 접근을 피했습니다. 대신 산업별 수요를 분석하고, 구체적인 협력안을 제안하는 실용 중심의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무리한 투자 요구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외교적 파트너십도 유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투자 패키지 전략은 단발성 정책은 아닙니다. 정부는 이 방식이 향후 통상 전략의 핵심이 될 것으로 보고 있으며, 각 부처는 분야별 협력 프로그램을 따로 계획 중입니다. 이번 회의는 그 출발점 입니다.
이번 한미 통상 협의는 새로운 전환점을 보여주었습니다. 민감한 품목은 과감히 빼고, 실현 가능한 투자 논의를 중심에 놓은 협상 전략은 한 걸음 물러서면서도 본질을 지킨 ‘유연한 외교’였습니다. 회피가 아닌 전략, 방어가 아닌 균형이었습니다. 향후 어떤 합의가 도출될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분명한 건 정부가 이번 회의에서 ‘협상의 틀’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는 점입니다. 이제 국민과 산업계는 정부가 어떤 방향으로 후속 조치를 이어갈지 주의 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